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수감 형무소를 가다.C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 수감 형무소를 가다.C
중국대련에 있는 뤼순감옥은 1902년에 지어진 후, 1907년에 대폭 확장되어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어 잔혹한 처우와 고문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현장 형무소(刑務所) 다.
여순감옥은 부지 2만7천500㎡에 감방 253곳과 지하감방 4곳, 15곳의 부설공장을 가진 규모로 2천명을 수감할 수 있으며 높이는 4m이며 길이 725m의 붉은 벽돌로 지은 담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모양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매우 흡사하다. 담장 안으로는 검색실, 고문실, 교수형실, 공장 등 15개의 혐오시설과 벽돌공장, 과수원, 채소밭 등 수감원들의 강제 노동현장이 보존돼 있다.
현재는 감옥의 일부가 박물관으로 변모해, 우리의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수감자들이 사용했던 물품들, 사진, 글씨 등을
비롯해 그들의 일상과 고통을 생생히 전해주는 다양한 전시물 등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단죄한 후 체포 수감 되어 최후를 마쳤던 곳이다.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병사했다.
"안중근(1879-1910)은 조선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나 1907년 조선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참모중장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 '대한독립동맹' 조직에 참여하였다. 동년 10월 26일 그는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주의 중심인물로 조선 초대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체포된 후 11월 3일 여순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일본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보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은 감옥 교수형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때 나이 32세였다." (안중근 의사를 구금했던 감방 안내문)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5일, 두 동생을 마지막으로 면회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주교, 빌렘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남겼다. 조선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은 이 보다 앞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2천만 동포들에게 전달됐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것이니 두려움이 없다. 더욱이 나는 천주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기뻐해다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두 동생에게 남긴 '최후의 유언')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수습되지 못하고 여순 어디엔가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