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金基昶)화백[1913.2.18~2001.1.23]충남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427번지 출생
태화산 기슭에 있는 마곡사를 가는 길이였다. 개울 옆 이정표에 운보 화백 생가지라고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 칠수 없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집터 안내 표지판에 김기창 화백집터라고 쓰여 있었다. 울타리안에는 비닐 하우스와 감나무만 있었다. 동내 사람들은 감나무 집으로 불렀으며, 4대가 살면서 그림 잘 그리는 집으로 통했다고 한다.
운보 김기창 화백 호적에 의하면 1913년 2월18일 유구리427번지(창말)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34세 때인 1947년 9월 5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으로 전적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화백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427번지가 고향(당시 신상면 창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태묵 유구읍장은 “김 화백은 일제 강점기 서울 토지관리국에 근무한 부친 김승환씨의 7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정진씨이지만 호적상으로는 조선경씨의 아들로 되어있다”고 한다.
김 화백의 제적등본. 대정2년(1913년) 2월 18일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김승환씨와 조선경씨의 장남으로 기록돼 있다.
부친 김승환씨가 고향인 유구에서 본처인 조선경(신풍)씨와 결혼 후 홀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하숙집 딸인 이정진씨와 인연을 맺고 낳은 아들이 김 화백이다.
김화백의 친 어머니인 이정진씨는 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으며, 아들 김 화백의 재능을 알아보고 대 작가로 키웠다고 한다.
김 화백의 부친은 서울 직장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인 유구에 내려와 살다가 별세, 유구읍 동해리에 묻혔다고 한다. 현재 김 화백의 집안 선산은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에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7세 때 장티푸스로 언어불능에 청각까지 잃었으나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워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첫 입선, 연 4회 특선을 했으며 24세 때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1950년대부터는 아내인 화가 박래현과 함께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 주로 서민적인 내용을 주제로 직선과 면 분할, 담백한 색채를 통한 조형의식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중엽에는 완전한 추상표현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작품세계는 계속 변모했으며, 마포걸레로 추상화 대작들을 그려내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71년 3·1문화상을 받았으며 한국미술대상전과 대한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했지만 친일 화가라는 역사적 오점이 있기도 하다.
주요작품은 1만 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으며, 대표작으로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등이 있다. 5·16민족상(1986)·서울시문화상(1986)·색동회상(1987)을 받았다.
(태양을 먹은 새, 청록산수, 바보산수, 노점, 구멍가게, 군마도, 탈춤, 군작,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1천 여점이 넘는 작품이 있다. 간추린 작품 몇점만 게재한다.
김대순 화가 개인전 (0) | 2011.10.12 |
---|---|
Line of Contral 2008-2010 (0) | 2011.09.09 |
최진순(崔瑨淳) 1988년作 (0) | 2011.04.12 |
고 김삼학(金三鶴)1981년作 (0) | 2011.04.12 |
레이나 라퍽(맥시코 화가) (0) | 2011.04.1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