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장 아르바이트 대타에서 LPBA 정상에 서기까지… ‘크라운해태 챔피언십’이 탄생시킨 가장 아름다운 대관식
1. 은빛 거울에 비친 환희의 입맞춤차가운 금속성의 트로피가 이토록 따뜻한 온기를 품을 수 있을까. 짙은 분홍빛 배경 위로 반짝이는 은빛 성배(聖杯), 그 매끄러운 표면에 한 여인의 붉은 입술이 조심스레 내려앉는다.
‘크라운해태 LPBA CHAMPIONSHIP’이라는 음각 글자 너머로, 트로피의 곡면을 따라 길게 투영된 정수빈(27·NH농협카드)의 얼굴은 마치 지난 세월의 인고와 영광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 같다.
살포시 감은 눈매와 닿을 듯 말 듯 트로피와 마주한 두 뺨의 대칭 속에는, 화려한 경기장의 조명과 가슴에 달린 주홍빛 코사지, 그리고 끝내 정상에 도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한 전율이 오롯이 맺혀 있다.

2. 1,490여 일의 기다림, 마침내 만개한 꽃기다림은 길었고, 마침표는 찬란했다. 여자 프로당구(LPBA)의 ‘차세대 스타’로 불리던 정수빈이 프로 데뷔 4년 1개월 만에 생애 첫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2026-27시즌 4차 투어 ‘크라운해태 PBA-LPBA 챔피언십’ LPBA 결승전. 푸른 당구대 위에서 펼쳐진 최후의 승부에서 정수빈은 백전노장 이미래(하이원리조트)를 마주했다.
승부는 숨 막히는 교향곡처럼 흘러갔다. 1세트를 11:1이라는 파격적인 스코어로 선취하며 기선을 제압한 정수빈은, 2세트마저 11:10 한 점 차의 짜릿한 승리로 가져오며 순항했다. 이미래의 저력에 밀려 3세트(10:11)와 5세트(8:11)를 내주며 추격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으로 4세트(11:7)와 마지막 6세트(11:5)를 매조지으며 세트스코어 4:2의 완승을 거두었다.
지난 2022-23시즌 3차 투어(TS샴푸·푸라닭 챔피언십)를 통해 프로의 문을 두드린 지 꼭 4년 1개월 만의 일이다. 무수한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하던 시간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유망주’라는 껍질을 깨고 진정한 ‘챔피언’으로 비상한 순간이었다.
3. 하남의 작은 당구장에서 시작된 운명의 변주곡 문학에서 가장 극적인 서사는 언제나 우연의 옷을 입고 찾아온다. 정수빈에게 당구가 그랬다. 대학교 3학년 시절까지만 해도 그녀는 캠퍼스를 누비던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운명의 변곡점은 동네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경기도 하남의 한 평범한 당구장이었다. 처음엔 그저 친구와 어울리기 위해 마실 가듯 들렀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초록빛 라사지 위에서 붉고 흰 공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궤적과 경쾌한 파열음은, 어릴 적 장난감처럼 보이던 당구를 전혀 다른 세계로 탈바꿈시켰다. 친구가 자리를 비울 때면 일일 대타로 카운터를 지키고 당구대를 닦으면서,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큐 끝으로 향했다. 구경꾼에서 동호인으로, 다시 프로 선수로 이어진 이 독특한 입문 과정은 수려한 외모와 맞물려 세간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불러모았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으로 빛나게 한 것은 외면의 화려함이 아니라, 우연한 호기심을 삶의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구도자적 열정이었다.
4. “당구는 호흡이자 일상”… 삶이 된 예술“어느 순간 당구는 내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듯이, 이제 당구를 뺀 제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수줍게 웃으며 건네는 그녀의 고백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준다. 누군가에게 스포츠는 승패를 가르는 경쟁의 도구지만, 정수빈에게 당구는 매일의 끼니이자 호흡과도 같은 생명 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사진 속 정수빈이 입을 맞추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은으로 세공된 트로피가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대학생의 삶을 뒤로하고 큐를 잡았던 용기, 수만 번 팔을 뻗으며 홀로 삼켜야 했던 고독한 연습의 시간, 그리고 마침내 은빛 표면에 당당히 자신의 얼굴을 비춰낸 지난 4년 1개월의 청춘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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