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찬 포토 에세이] 왕을 찍는 남자, 90세 거장의 뷰파인더에 비친 오늘.
거대한 ‘지나(Sinar)’ 카메라 뒤, 시간이 멈춘 충무로의 비밀의 방
서울 중구 수표로 정석빌딩 302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로 회귀한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전시장를 방불케 하는 각종 대형 렌즈와 확대기 사이로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거대한 ‘지나(Sinar)’ 8x10인치 대형 카메라다.
이곳은 구순(九旬)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청년처럼 셔터를 누르는 유재력(兪在力, Jae Ryuk You 90세) 원로 사진작가의 아지트이자, 디지털 시대에 보기 드문 19세기식 감광 인화지 촬영 방식을 고수하는 아날로그 스튜디오다.
지난 5월 13일 오후, 한때 대한민국 격동의 현장을 함께 누볐던 전직 중앙 일간지 사진기자 선후배들(김동준, 박교원, 김윤찬, 김일현, 김철호)이 이 특별한 공간에 모였다.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묵직한 카메라 앞에서, 후배들은 오랜만에 렌즈의 ‘피사체’가 되어 사진의 고전이라 불리는 19세기식 흑백 촬영과 암실 현상이라는 마법 같은 순간을 함께 호흡했다.
“표정 속에 대화가 있고, 그 안에 한 사람의 역사가 있다.” > 돋보기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노(老)작가의 눈빛은 서슬 퍼렇게 살아있었다.
빛과 어둠의 미학, 인화지로 찍는 음화(陰畵)와 양화(陽畵)
유재력 작가의 인물사진(포츄레이트)은 독특하다. 필름을 거치지 않고 카메라에 감광 인화지를 직접 넣어 촬영하는 방식이다. 확대기 빛으로 거쳐 나온 결과물은 세상에 단 한 장뿐인 음화(Negative)와 양화(Positive)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친 듯 깊고 강렬한 흑백의 미학을 뿜어낸다.
스튜디오 모니터와 현상된 인화지 속에 드러난 후배들의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의 주름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었다. 촬영부터 조명, 현상, 그리고 마지막 디지털 포토샵 작업까지 거침없이 고수해 내는 유 작가는 그야말로 ‘종합 사진 예술의 마법사’였다.








레이션 박스 카메라에서 말레이시아 왕실 작가까지
유재력 작가에게 사진은 운명이자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고등학교 물리 시간, 렌즈의 원리를 배우며 카메라에 매료되었던 청년은 6·25 전쟁 직후 흔하디흔한 사진기조차 구하기 어렵던 시절, 미군 레이션 박스(전투식량 상자)를 뜯어 직접 카메라를 만들 만큼 지독한 열정을 품었다.
이후 대학 학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의 사진기자로 맹활약하며 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분수령마다 역사의 목격자로서 셔터를 눌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페이지는 ‘말레이시아 왕실 공식 작가’라는 독보적인 이력이다.
“말레이시아는 관공서나 식당 등 공공장소에 왕 부부의 초상화를 걸어두어야 합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 그 나라의 ‘공식 초상화’가 되는 것이었죠.”
이처럼 국경을 넘어 K-사진의 효시가 된 그는 국제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광고 산업 발전 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는 ‘중구 우수 사진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신이 역사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 10,000명의 얼굴을 향해
그는 오랜 시간 대형 카메라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하고도 위대한 이들의 얼굴을 기록해 왔다. 그 결실로 탄생한 것이 바로 124인의 얼굴과 인생을 담은 흑백인물사진집 《당신이 역사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 124人》이다.
노작가의 시선은 이제 더 먼 미래를 향하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 1만 명의 포츄레이트를 찍어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현재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 중이다.
“저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입니다. 평생 사진으로 나를 표현해왔지요. 사진은 단순히 사실을 찍는 게 아니라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찰나를 포착하는 겁니다. 그 선택이 곧 나이기에, 나는 평생 사진을 통해 ‘나’를 기록해 온 셈입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 지 60여 년. 켜켜이 쌓인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깊은 유재력 작가의 기록은 곧 우리의 삶이자 역사다. 카메라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시대를 유영하는 노작가의 여정은 여전히 푸른 청춘이며, 그의 셔터 소리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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